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 (문단 편집) == 서론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 -5px" [youtube(WED0ifTgarw)]}}} || || {{{#ffffff '''1930년대 나치의 사상적 기반과 선전 활동'''}}} || [[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]](나치당)이 1933년 [[수권법]]을 통과시킴에 따라 독재의 기반을 만들고[* 수권법 통과 이전까지 나치당은 [[바이마르 공화국]]에 존재하는 많은 정당들 중 하나였으며, 유권자의 투표에 따른 민주적 절차로 선출되었다. 당대 독일 국민의 민심은 나치당이 권력을 잡는 것을 허락했을 정도로 극단주의화되었으며, [[제1차 세계 대전]]에서의 패배, 그에 따른 가혹한 [[베르사유 조약]]에 대한 들끊는 분노와 [[유대인]]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. 이 밖에 정당 정치의 폭주를 막을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, 패전 이후 독일이 기본법 1조에 인간의 존엄성을 넣고 헌법수호청을 설립한 이유가 되었다.] 1934년 [[파울 폰 힌덴부르크]]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[[아돌프 히틀러]]가 총통에 취임하게 되자 완전한 독재 국가인 나치 독일이 탄생하였다. 1936년 [[라인란트 재무장]]으로 자신감을 얻은 나치 독일은 독일어권 지역을 독일의 영토로 포함시키려는 목적으로 1938년 [[안슐루스]]를 시작으로 [[뮌헨 협정]]을 통해 주데텐란트를 획득하고 [[체코슬로바키아]]를 [[보헤미아-모라비아 보호령]]과 [[슬로바키아 제1공화국]]으로 분할시켰다.[* 이 체코슬로바키아 해체는 사실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아니었는데, 이미 [[주데텐란트]]를 빼앗긴 이상 [[체코슬로바키아]]는 나치의 위성국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. 그러나 뮌헨 협정 이후 [[영국]]이 '앞으로의 대의를 자국과 함께 논의해야 한다'는 독일 입장에서 황당한 조건을 내걸자, 히틀러는 여기에 패배 의식을 느끼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몸통을 쪼개버린 것이다.] 또한 1939년 [[폴란드 침공]]으로 [[제2차 세계 대전]]을 일으키고 이후 [[노르웨이 침공]]과 [[프랑스 침공]]에서 승승장구하다가 [[영국 본토 항공전]]에서 처음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다.[* 영국의 공군 비행장이 아닌 [[런던]]만을 폭격했기에 영국은 전투기를 계속 생산해낼 수 있었고, 결국 전투 후반부터 제공권은 온전히 영국에게 넘어간다.] 그 후 [[북아프리카]][* 다만 이쪽은 [[이탈리아 왕국]]이 [[이집트 왕국]]을 침공하였으나, 패배를 거듭하자 독일군이 개입한 것이다. 사실상 [[독일 국방군]]과 [[영국군]]의 전투에 가까웠고 [[이탈리아 왕국군|이탈리아군]]과 [[이집트군]]이 보조 병력 수준이었다.]와 [[유고슬라비아 침공]], [[그리스 침공]][* 이쪽도 북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[[이탈리아]]가 먼저 공격했다가 역풍을 맞자 독일이 도와주러 갔다.]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, 1941년 [[독소 불가침조약]]을 파기하고 [[바르바로사 작전]]을 개시해 [[독소전쟁]]을 일으켰다. 처음에는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[[소련]]의 반격으로 [[모스크바 공방전]]에서 패배해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데다가 동맹국인 [[일본 제국]]의 [[진주만 공습]]으로 인한 [[미국]]의 대일 선전포고를 빌미로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. 1942년과 1943년에 걸처 동부전선은 [[스탈린그라드 전투]]와 [[쿠르스크 전투]]로 결국 수세에 들어섰다. [[북아프리카 전역]]은 [[횃불 작전]]으로 완전히 패배했으며 [[시칠리아]]에 상륙을 허용했고, [[이탈리아 왕국]]이 항복해 연합국으로 전환하여 [[이탈리아 전선]]이 생기고 만다. 1944년 서부전선은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으로 완전히 양면전쟁을 맞이하게 되고, 동부전선은 [[바그라티온 작전]]으로 중부집단군이 궤멸되며 [[동유럽]] 대부분에서 후퇴하게 되었다. 1945년 [[베를린 전투]]에서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[[베를린]]이 함락되며 완전히 소멸했다. 패전의 결과로 [[연합군 점령하 독일|독일은 연합군에 점령]]되었으며, [[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|오스트리아 또한 점령]]을 겪었다. [[연합국]]의 식민지였거나 적대적이었던 국가들은 '적의 적은 아군' 논리로 나치 독일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, 어디까지나 이들은 연합국에 대항할 국가로서 [[추축국]]에 우호적이었던 것뿐이다. 독일군이 소련에 진군했을 당시 [[이오시프 스탈린]] 치하의 소련의 압제와 [[유제프 피우수트스키|피우수트스키]] 치하의 [[폴란드]]의 침공을 받았던 과거가 있던 [[우크라이나]], [[리투아니아]] 등을 비롯한 동유럽 소수 민족들은 독일군을 해방자라고 환영했으나 [[독소전쟁]]을 벌이면서 학살 또한 일어났고 결국 사람들은 등을 돌리게 되었다. 다만 [[발트 3국]]만은 예외로, 이 세 나라들은 워낙 역사적으로 소련과 악감정이 심한 데다가 독일로부터 심한 학살도 안 겪였던 관계로 지금까지도 나치 부역자들이 애국자로 취급되고 나치 상징물 사용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.[* 왜냐하면 이들 세 국가는 애초에 나치 독일 이전에 [[발트 3국 침공|소련이 먼저 침공하여 점령하였기 때문]]이다.] 비슷하게 소련과 원한 관계가 있지만 나치 역시 혐오하는 분위기가 강한 [[우크라이나]]와는 대조적이다.[* 물론 최근에는 [[돈바스 전쟁]]과 [[유로마이단]] 등으로 우크라이나 내 반러 감정이 급증하였고, 급기야는 [[아조프 연대]] 등 [[네오 나치]] 세력이 공식적으로 돈바스 전쟁에 참전하거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했던 [[스테판 반데라]] 같은 현지의 나치 부역자들을 추켜세우는기도 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나치 독일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아직 발트 3국 정도까지는 아니며, 국내의 반나치 여론은 여전히 건재하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